조직의 변천과 역사적 의의
시대적 배경과 목적
일제의 침략야욕이 나라를 덮쳐오던 시기,
1895년 을미의병부터 1910년 정미의병까지 군대로 조직되어 수많은 전투에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던 의병전쟁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1907년 비밀결사의 형태로 조직되어 공화제를 추구하던 신민회(新民會)의 활동이 있었다. 이들은 일제의 무단정치가 시작되는 1909년부터 조직이 무너지는 1911년까지 점차로 해외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한다. 대한광복단은 이러한 두 가지 큰 흐름의 정신을 계승하며 일제를 몰아내고 자주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역사적 의의
일제의 무단정치 이후 처음으로 국내에서
- 일본 강점세력에 대해 정면으로 무장투쟁을 선포했으며,
-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상 처음으로 광복(光復)이라는 명칭을 도입하였다.
- 또한 처음부터 전국적이고 국제적인 조직이었으며,
- 민국(民國)을 지향했다.
이는 채기중이 일제 고등법원에 제출한 상고취의서에 ‘만주에서 조성호, 김용한과 함께 민국을 조직하는 것을 논의했다’는 사실이 서술되어 있고, 또 그가 1917년 음력 4월 전남 자산가들에게 보낸 경고문에 ‘민국의 건설’에 대해 적었던 것에서 나타난다. 비슷한 시기 임병찬 등이 고종황제의 밀칙을 받아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던 것과는 대조된다.
대한광복단의 활동과 조직적 변천
1913년 대한광복단
1913년과 1914년에는 모험용사대의 모집과 훈련, 무기조달에 총력을 기울인다. 자금조달을 위해서는 강순필이 근북면(지금의 제천시 봉양면)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광산에 잠입하는 등의 활동을 펼친다.
1915년 광복회
1915년 박상진, 이복우, 우재룡 등이 합류하여 대한광복단은 대국 달성공원에서 광복회로 확대개편된다. 군사조직의 형태로 거듭나며 박상진이 총사령, 이석대는 부사령, 우재룡, 권영만이 지휘장을 맡는다. 채기중은 경상지부장을 김한동은 충청지부장을, 이병찬, 김선호, 최봉주, 조현균, 이관구, 김동호가 각기 전라, 경기, 함경, 평안, 황해, 강원의 지부장을 맡아 조직을 이끌게 된다.
이 시기에 우재룡, 권영만은 경주에서 세금수송마차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조달한다. 그러나 1916년 소위 대구권총사건에 연루되어 박상진이 옥고를 치르게 되어 광복회의 활동이 저해된다
1916년 대한광복단의 재흥
한훈의 기록에 의하면 채기중, 한훈 등이 서울에서 노백린, 김좌진, 기명섭 등과 함께 대한광복단을 재흥시키며 『吾團은 大韓獨立國權을 光復하기 위하야 死로써 決意하고 仇敵日本을 完全驅逐하기로 天地神明께 誓함 (우리 대한광복단은 대한의 독립된 국권을 광복하기 위해 죽음으로써 결의하고 원수 일본을 완전히 몰아내기를 천지신명 앞에서 맹세한다)』라고 혈맹을 맺고 국내와 국외의 활동을 분산시키기로 결의하였다고 한다. 노백린과 김좌진은 이 때 만주로 파견된다.
이 부분, 대한광복단의 재흥에 대한 해석에는 역사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존재하지만 한훈선생의 기록은 이 당시의 상황이 단원들 간의 혈맹을 요구하였고 광복회 조직 전반에 있어 더욱 견고한 비밀조직화의 기간이었음을 말해준다. 1916년 이후 조직원들 사이에 광복단과 광복회의 명칭 사용이 혼재하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1918년에 이종복의 밀고에 의해 충청지부장 김한종을 필두로, 총사령 박상진, 경상지부장 채기중까지 체포되자 조직은 와해의 위기를 맞는다.
1919년 의열단
많은 단원들이 해외로 망명하며 밀양의 황상규, 김대지 등은 만주에서 의열단을 창단한다. 그리고 김원봉 · 김상윤 · 윤세주 · 한봉근 등의 지도자를 양성한다.
1919년 암살단-주비단-광복단결사대
국내에 남아 있는 단원들은 암살단(김상옥), 주비단(우재룡), 광복단결사대(한훈) 등의 형태로 일제 탄압에 극렬히 맞서며 활동하였다.
1920년 암살단과 광복단결사대의 김상옥과 한훈 등은 미국국회의원들이 경성을 방문하는 것을 게기로 조선총독 사이또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나 거사 하루 전에 예비검속에 걸려 모두 체포되고 김상옥만 탈출하여 만주로 망명한다.